2018년 12월 14일 금요일

TG-Flu Survivors Meeting


'... 벌써 30분이나 지났는데..'

시립 도서관의 작은 세미나실, 헤더는 초조한 얼굴로
자꾸만 시간을 확인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건 'TG-독감' 생존자 모임의 참석자들.
모임은 두 달전, 미 전역을 강타한 TG-독감에 걸려 갑작스럽게 인생이
뒤바뀐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시에서 마련한 상담 프로그램이었다.

피해범위가 32개주에 달했고, 전체 인구의 20%가 감염된 질병인만큼
헤더가 첫 모임을 열었을 때엔 참석자들로 북적였다. 젖먹이 갓난 아이를
두고 남자가 되어버린 싱글 맘. 보안업체 일을 하다 여자가 되어버린 관계로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한 남자.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매주 이곳에 모여 변화된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서로 나눴고,
헤더 역시 가볍게 지나가긴 했지만 TG-독감에 걸려 여자가 되었던 관계로
많은 위로를 받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참석자가 줄기 시작했다. 하나 둘 빈 자리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겨우 8번째 모임인 오늘 마침내 아무도 참석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하긴, 이런 사태를 예견할 만한 조짐은 진작부터 눈에 띄었었다.

TG-독감의 특성인지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원래 그 성별이었던 사람들조차
부러워 할 법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선남선녀들이 모여 있다보니
자연스레 하나 둘 눈이 맞아 나가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치 병목현상이 풀리기 시작한 순환도로처럼 언제부턴가 다들
바뀐 인생이 얼마나 행복한지 떠들기 시작했고, 생존자 모임은 문 밖에 붙인
작은 표지만 없다면 단체 미팅으로 착각할만큼 분위기가 바뀌어왔던 것이다.


사실 헤더도 TG-독감의 생존자고 모임의 주최자긴 하지만, 딱히 요즘의 생활이
괴롭다거나 적응하기 힘들다거나 할 만한 건 없었다. 되려 만족스럽게 바뀐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작고 왜소한 체격에 말단 공무원이었던 헤럴드 시절의 그에게
연애라는건 먼 나라 이야기였는데, 헤더로 살기 시작한 후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부쩍 자신에게 먼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던 것이다.
심지어 며칠 전엔 바에서 술을 한 잔 사도 되겠냐고 접근한 남자까지 있을 정도였다.

헤더가 여자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 남자들이 그렇게 접근해 오는게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몸이 바뀌면 마음도 바뀐다던가.
요즘 들어선 뻔히 보이는 수작을 걸어오는 남자들이 어쩐지 귀엽게 보이기도 하고
다른 여자직원들 앞에서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면 왠지 우쭐하기도 한 것이
썩 나쁘지 않았던 터였다. 다만 최근에 그녀에겐 다른 고민이 하나 생겼는데..

결국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모임. 헤더는 그만 정리할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다 서류철 하나를 바닥에 흘렸다. 허리를 숙여 집어들고
가방에 도로 넣으려는데, 익숙치 않아야 할테지만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제길..'

깊이 패인 V넥 티셔츠 사이로 슬쩍 들여다 보이는 가슴 골. 아니 가슴 평야..
어찌된 일인지 TG-독감은 그녀에게 모델같은 얼굴과 늘씬한 몸매는 주었지만,
정작 여성미의 원천인 풍만한 볼륨감은 주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엔 헤더도 굳이 속옷을 따로 갖춰 살 필요도 없고, 혹시 남자로 돌아가게 되면
훨씬 수월하겠다 싶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쉬워지게 될 줄은..

헤더는 가방을 맨 채로 핸드폰을 꺼내 참석자 연락처를 뒤졌다.

'경비였던 테드, 아니 테미씨가 다시 일자리를 구한 곳이 빅토리아 시크릿 이랬지?..'

제발 그 명성 자자한 푸쉬 업 브라가 들었던만큼의 효과가 있기를..
이제 그녀, 헤더에게도 다른 종류의 '카운셀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