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4일 토요일

Venus Flower


해변을 거닐던 스테파니는 우연히 물 위에 떠밀려 온 노란 꽃 한송이를 발견했다. 놀란 얼굴로 그 꽃을 집어든 그녀는 그러나 금새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아, 이 꽃 덕분에 그녀의 인생이 몇 년간 얼마나 극적으로 변했는지..

그 때도 이 섬에서 같은 해변가를 거닐던 중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이름이 스테파니가 아니라 '스티브'였을 뿐. 그 때도 파도에 떠밀려 온 꽃을 발견하곤 바닷가에 웬 꽃인가 싶어 주웠었다.

꽃에선 뭐라 설명하기 힘든 이국적인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스티브는 여자친구에게 보여주려고 꽃을 숙소로 가져갔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현지인들이 '여신의 꽃'이라고 부르는 그 꽃이 어떻게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지..

막 호텔로 돌아왔을 때 그는 마치 독감에라도 걸린 것처럼 열이 나고 무기력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빈 병에 물을 담아 꽃을 꽂아 놓고는 여자친구를 기다리는데, 아무래도 그녀는 아직 해변에서 돌아올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견디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스티브는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잠이 깼다.
그의 여자친구가 자신을 가리키며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몸을 일으키려는데,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이 자못 심상치 않았다. 아찔하게 솟아오른 두 봉우리와 그 사이로 흘려내리는 금발의 머리카락. 얼마 간의 소동과 현지 출신 호텔 지배인의 설명 끝에 두 사람은 겨우 사태를 파악하고 진정할 수 있었다.

지배인은 일단 얼른 꽃을 가져오라고 했다.
아직 꽃이 시들지 않았다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침실로 돌아갔을때 병에 꽂아둔 꽃은 이미 일주일은 지난 듯 시들어버린 뒤였다. 따라 들어온 지배인은 난처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 꽃은 마법같은 향기와 특성으로도 유명하지만 발견하기 힘든 것으로 더 유명하다는 것이었다.

별수없이 돌아간 뒤에도 스티브는 몇 번씩 섬으로 돌아와 혹시 꽃이 있을까 해변가를 뒤지곤 했지만, 점점 변해버린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연인인 사라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점점 데면데면해가던 둘의 사이는 어느 날 스티브가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를 그만두고 '스테파니'로 살겠다고 선언하자 결국 종언을 고했다.

연인관계는 그렇게 끝이났지만, 다행이 한 달만에 복귀한 그의 직장에선 여자가 되어 돌아온 그를 기꺼이 받아들여 주었다. 물론 꽃 때문에 변했다는 이야긴 적당히 해외에서 수술을 받았다는 식으로 바꿔야 했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놀라우리만치 아름답게 변했다고, 그동안 숨기고 사느라 고생했다고 격려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여성으로서의 새로운 일상에 익숙해져 갈 즈음, 스테파니는 문득 그 섬에 한 번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름 휴가. 그녀는 다시 섬을 찾았다. 이번엔 이전처럼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여신의 꽃을 찾아 해변가를 뒤지지 않았다. 그저 불행한 결말로 끝난 그때의 기억을 새로운 추억으로 채워넣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러다 그녀의 눈에 띄게 된 것이다. 파도에 실려 온 노란 꽃.
다시금 그 오묘한 향기를 깊게 들이 마시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향기를 맡는 대신 오랫동안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그 꽃을 바라보다 인기척을 느끼고는 눈을 돌렸다. 함께 온 그녀의 예비 신랑이었다.

"와~. 무슨 꽃이야?"

스테파니는 남자에게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자긴 모를거야. 이 꽃이 얼마나.."

"응..?"

"아냐. 어우 춥다. 자기야 좀 쌀쌀해진거 같지 않아? 우리 얼른 들어가자."

스테파니는 행여나 꽃향기가 남자에게 닿을까 황급이 물가에 꽃을 던져 놓고는 얼른 그의 팔짱을 꼈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겨우 다시 찾은 행복을 소중히 지켜내는 것. 지나간 미련 때문에 또다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만큼 그녀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녀가 남자의 등을 떠미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꽃은 파도에 실려 멀리멀리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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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Caption: http://michellescaps.blogspot.com/)

2019년 8월 2일 금요일

Seats for Pregnant Women


“아찻차차~!”

지하철 문이 막 닫힐 쯤, 서류가방을 든 손이 먼저 쑤욱 들어오더니 이내 젊은 회사원 하나가 솜씨좋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남자. 남자는 꽤나 지친듯 잠시 숨을 고르더니 빈자리가 눈에 띄자 얼른 다가가 털썩 주저 앉았다.

‘차가 빨리 공장에서 나와야 이 고생을 안 하지. 휘유~’

겉옷을 벗어 무릎 위 가방에 포개어 놓는 남자. 핸드폰을 꺼내 스케쥴을 확인하던 중 문득 께름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노선도를 확인하는척 슬쩍 시선을 돌려 주위를 훑어 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한자리 옆 오른편에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서있었는데, 이쪽을 흘끔거리는 표정이 영 떨떠름 한 것이 아닌가.

'뭐야. 왜..’

남자는 뭐라도 묻었나 싶어 다시 시선을 내려 옷매무새 등을 살펴보는데,
아뿔싸, 자신이 앉은 자리만 유난히 분홍색의 시트인 것이 눈에 띄었다.

'아.. 임산부 배려석인가 뭔가 그건가..’

머쓱해진 기분에 자리를 옮길까 싶었지만, 역을 지나면서 슬슬 사람이 들어차 일어나면 내내 서서가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남자는 일어나려던 것을 멈추고 도로 몸을 기대었다.

'에라~. 어차피 지금 누가 서있는 것도 아닌데, 앉아 있다가 오면 양보해 주면 되지. ’

다음 거래처에서 녹초가 된 모습을 보일 순 없었기에 남자에겐 어쨌든 지하철을 타고 가는 지금, 잠깐의 휴식이 절실했다.

'아니 같은 돈 내고 탔는데 빈자리에 앉는 것도 눈치 봐야되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남자의 머쓱했던 기분은 공연히 자신을 흘깃 거리던 여학생에 대한 괘씸함으로 바뀌었다.

요즘 특히 젊은 여자들 중에 극성인 인간들이 있다는데, 괜히 자신도 사진같은게 찍혀 인터넷에 나돌아다니는게 아닌가 다시 여학생쪽을 돌아봤다. 다행인지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던 여학생은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직도 영 개운치 않았지만, 남자는 애써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 잘 보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임산부 같은 사람이 근처에 보이거든 비켜줘야지..’

생각은 그렇게 했건만.. 단조롭게 이어지는 인터넷 페이지들을 기계적으로 스크롤 하다보니 남자의 눈꺼풀도 어느새 스르륵 피곤으로 감겨왔다.

'으흐흐음…’

그 잠깐 사이에 선 잠이 들었던 것일까. 남자는 나른한 기운에 감싸여 꿈속을 해매었다. 엄마로 보이는 아리따운 여성이 어린 아이와 함께 볕이 잘 드는 공원에서 한가로이 늦은 오후를 보내고 있는 꿈이었다. 이상스러운 건 생전 본적 없는 여성임에도 왠지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아함이 물씬 풍기는 분위기 하며 사랑스럽게 아이를 바라보는 저 눈빛.. 많이 익숙한 느낌이었다.

꿈속에서 여자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남자는 문득 자신이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게 아니라 여자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풀밭에 앉아 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데, 어깨쪽으로 따라올라가 보니 다름 아닌 자신에게서 뻗어 나온 팔이 아닌가..

’…이게 대체….’

이상한 일은 꿈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팔걸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잠들어 있던 남자의 몸에도 기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최초엔 자다가 찬 기운을 느낀것처럼 작은 떨림이 보이더니 몸을 뒤척일 때마다 뚜렷한 변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빗어넘긴 짧은 머리가 쑥쑥 자라나더니 목덜미를 덮기 시작했고, 금새 자연스러운 웨이브 펌이 들어간 머리채가 어깨 밑으로 드리워졌다. 머리색도 군데군데 밝은 갈색으로 옅어지자 영락없이, 브리지를 넣은 여성의 긴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채에 감싸인 남자의 얼굴도 변해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탁한 빛이 돌던 피부톤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조금 살이 붙은 각진턱은 갸름한 U자형으로, 콧망울과 콧잔등 또한 볼륨을 줄여 갸녀린 선으로 변해갔다. 또한 얼굴형만 바뀐 것이 아니라 어느새 풍성해진 속눈썹은 물론, 눈 주위도 옅은 화장까지 입혀진 상태로 변해 있었다.

'흐으응~’

아직 꿈 속인 남자가 얼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자극을 느꼈는지 몸을 뒤척이는데 방금 전보다 훨씬 가벼운 톤의 비음이 흘러 나왔다. 남자의 얼굴을 완전히 30대 초반 즈음의 여성으로 바꿔놓은 그 무언가가 그의 목도 가늘고 긴 여성스러운 목으로 빚어 놓은 탓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마법같은 변화는 어깨를 타고 아래로 번져 나갔다.

최근 살이 쪄 조금 작은 와이셔츠를 꽉 채우고 있던 어깨와 팔이 줄어드는가 싶더니 이내 소매 안에서 헐렁함 까지 느껴질 정도 가늘어졌다. 그리고 소매 끝에는 남자의 꿈속에서 본 바로 그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뻗어나왔다. 가늘어 진것은 몸통도 마찬가지였는데, 전체적으로 체구가 두 치수 정도 줄어 든 듯 아까까지 좌석을 꽉 채웠던 커다란 등판은 어디가고 이젠 앉아있는 의자의 등쪽 분홍색 시트가 널럴하게 보일 정도로 호리호리한 체형이 되어 있었다.

다만 가늘어지지 않은 곳은 이제는 남자 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그의 둔부와 허벅지였다.
매일 발이 닳도록 영업을 다니느라 단련된 허벅지가 바지 속에서 조금 부푸는가 싶더니 마치 바람 넣는 막대풍선처럼 바지 안을 꽉 채워가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했던 허벅다리가 배흘림 기둥같이 유려한 곡선으로 바뀌어가는 동안 그의 엉덩이 또한 쿠션처럼 살이 붙기 시작해 때마침 얄쌍하게 가늘어진 허리와 아찔한 대비를 만들어 내었다.

다리를 쭉 훑어내려오며 잔뜩 여성적인 볼륨감을 만들어내던 그의 변신은 발목께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저 통통한 하체를 어찌 버틸까 싶을정도로 가늘어지더니 이내 발도 작아졌는지 꼰 다리의 발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구두의 뒷꿈치가 턱하고 빠져나와 덜렁거렸다.

남자는.. 아니 이젠 여자라고 칭하는 수밖에 없어보였다. 여자의 몸에 걸쳐져있는 옷은 아직 '그녀'가 아침에 입고 나왔을 와이셔츠에 정장바지 차림새 그대로였지만, 이제는 마치 남의 옷을 입은듯 어색해 보였다. 조금 밋밋한 가슴쪽을 제외한다면 영락없이 장난삼아 남자친구나 남편의 옷을 빼앗아 입은 여인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약간의 어색함을 감지하기라도 한 것인지 남자를 여자로 바꿔놓은 변화는 다시금 위로 올라와 작업을 이어나갔다.

이번에 변하기 시작한 곳은 바로 밋밋해 보였던 상체쪽이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그..녀.. 가 크게 심호흡이라도 한 듯 셔츠의 가슴 부분이 들썩이나 싶더니 그 약간의 융기는 그대로 살덩이가 되어 셔츠안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둥그렇고 말랑한 살덩이가 셔츠 안을 비좁게 채워나가자 결국 그 첨단에 딱딱하게 솟은 유두가 이따끔씩 얇은 런닝과 와이셔츠의 천 위로 비쳐 보였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배가 가슴 이상으로 커다랗게 부풀기 시작했다. 마치 남자에서 여자로 변하는 동안 몸 안으로 줄어들었던 것들이 다 그리로 모여 부풀어 오르는 듯한 인상이었다. 마치 임신한..

아닌게 아니라 늘씬하게 변한 여자의 몸에 어울리지 않게 잔뜩 부푼 배는 영락없는 임산부의 배였다. 그것도 곧 산달이 임박한 만삭의 임산부였다.

이 황당한 변화에도 더욱 놀라운 것은 주위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눈앞에서 멀쩡한 남자가 임신한 여자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도 사람들은 잠시 눈길을 줄 뿐 이내 흔하게 보던 일인 양, 다시 각자 들고 있던 핸드폰이나 책, 신문등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특히나 남자가 막 자리에 앉았을때 아니 꼬운 표정으로 이쪽을 보던 여학생 일행은 이제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흐뭇한 미소까지 띄우며 임산부로 변한 남자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남자를 임산부로 완벽히 바꿔놓은 기묘한 변화는 제 할일을 마친것 같았지만, 여학생들은 그게 아닌것 같았다. 속닥이는 것을 들어보니 뭔가 더 기대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이번엔 발끝부터였다. 발끝에 겨우 걸려있던 검은색 구두의 형태가 조금 흐물흐물해 지는 것 같더니 점차 작아진 발에 꼭맞는 낮은굽의 웨지힐로 바뀌어갔다. 뿐만이 아니었다. 회색 양말은 점점 투명해지다가 커피색의 스타킹으로 변해 가느다란 발목을 그대로 감싸고 타고 오르기 시작했고, 동시에 바짓단도 스타킹을 따라 올라가며 위로 짧아지기 시작했다.

무릎위까지 점점 짧아지던 바짓단은 어느샌가 가랑이가 붙어 마치 치마처럼 모양이 바뀌어갔다. 몸매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H라인의 스커트로 바뀌는 통에 살이 오른 통통한 허벅지가 더욱 돋보였다. 또한 와이셔츠도 '바지였던’ 스커트와 하나로 이어지고 군청색으로 물이 들자 평범헀던 셔츠 정장은 잠깐사이에  영락없이 원피스가 되어버렸다. 늘씬한 옆라인을 살리면서도 불룩한 만삭의 배를 편안하게 감싸는 디자인의 세련된 임부복이었다.

아까부터 이쪽을 쳐다보던 여학생들이 기다린게 이것인듯 옷이 너무 이쁘다는 둥 서로 호들갑이었다. 그 떠드는 소리 때문이었을까? 쉽사리 선잠에서 깨지 못하던 남자, 아니 여자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뗐다.

'아… 머리야..’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조금 찌푸린 얼굴.. 무의식적으로 출입문 위 안내방송이 나오는 모니터를 쳐다보던 여자는 그러나 잠시후 자신의 불룩한 배를 내려다 보고는 뭔가 중요한 걸 잊은 듯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

지하철이 역에 정차하자 또 다시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마침 비어있던 그녀의 옆자리에도 몸놀림이 잽싼 중년의 아주머니 한 분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멍한 표정이던 여자를 쓱 한번 훑어보는데, 불룩하게 나온 배를 보곤 아줌마들 특유의 붙임성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어휴, 앞에서 얼핏 볼땐 늘씬해서 아가씬줄 알았는데, 한참 조심해야 할 때네. 몇개월이에요? 7개월? 8개월?”

“…네?”

마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공허한 눈으로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는 그녀.
그녀의 머릿속은 몇개월은 커녕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기억조차 온데간데 없이 아득히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웬 아줌마가 고개를 갸웃하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캐물어 오지만 생각나는건 없고, 여자는 난처해 죽을 지경이었다.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다행이 며칠 전에 바꾼 그 벨소리 만큼은 기억이 났다. 여자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싶어 양해를 구하고는 얼른 가방을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분명 자신의 손에 들려있지만 낯선 가방. 다행이 핸드폰은 어렵지 않게 찾을수 있었다.

'달칵~’

습관처럼 잠긴 것을 풀고 메시지를 확인해보는데 처음보는 번호였다. 평소라면 보지도 않고 지웠겠지만, 그녀는 더 귀찮은 옆자리의 상황을 잠시라도 피하기 위해 방금 온 메시지를 터치했다.

그 순간…


여자의 눈에 쏘아져 들어오는 어지러운 불빛들..
일종의 최면술이라도 거는듯, 아니 일종의 시각화된 데이터를 전송이라도 하려는 듯 강렬하게 번쩍이는 불규칙한 패턴들이 그녀의 망막을 찔러 들어왔다. 실로 잠깐의 시간이었다.

이윽고 번쩍거리던 그 몇초의 찰나가 지나자 멍하니 화면을 쳐다보던 여자의 머릿 속엔 새로운 정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댁. 새댁! 괜찮아?”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 꺼진 핸드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여자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오른쪽을 돌아다 보았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아주머니를 발견하자 그녀의 얼굴엔 예의발라 보이는 미소가 번졌다. 아까까지 멍했던 표정과는 다른 생기가 도는 얼굴이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깜빡 딴 생각을 했나봐요.. 호호호..”

게다가 살갑게 말까지 건내는 여자.

“몇개월이냐고 하셨죠? 오늘로 8개월 째에요. 오늘은 그래서 정기검진 받으러 가는 중이구요.”

“어이구, 그래요? 하여튼 조심해야 돼. 요즘 젊은 엄마들 임신중에도 너무 맵시 챙긴다고 다이어트 같은거 하고 그러던데 엄마 될 사람이 그러면 위험해.”

“어휴 다이어트는요. 병원에서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야 출산할 때 편하다고 해서 요가랑 운동 몇가지 하고 있어요.”

방금 전까지의 당혹스러워 보였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되려 여자는 옆자리의 중년 여인과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사실 여자도 수다는 떨고 있지만, 방금 전 잠시 멍했던 일이 기억에서 맴돌았다. 뭐 때문이었을까.. 아마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일거라 그녀는 적당히 결론을 내렸다.

“이번 역은 OO. OO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어머, 벌써..”

“응? 왜 새댁? 내릴역이야?”

“네. 정신없이 이야기 하다보니 어느새..”

“어휴, 그래 새댁 조심하고 계단으로 가지말고 엘레베이터 타.”

“ㅎㅎㅎ.. 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안전바를 잡고 무겁게 몸을 일으키는 그녀. 이윽고 전철이 플래폼에 정차하자 문 앞에 서있던 여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지하철에서 내려 발걸음을 옮겼다.

'아 잠깐..’

몇 걸음을 걷던 여자는 발걸음을 멈췄다. 짐짓 심각한 표정이 되었지만 별건 아니었다. 다만 문득 병원으로 나가는 쪽이 어딘지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방을 열고 핸드폰을 꺼내 방금 전에 봤던 진료안내 문자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김희연님 진료예약 17일 금요일 2시. OO병원. 오시는 길은…’

지하철에서 봤던 정체불명의 영상은 어느새 친절한 진료안내문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 4번출구 였지. 나 참, 요새 정말 깜박깜박 한다니까..’

여자는 잠시 기억이 나지 않던 자신을 자책했으나 이내 다시 가방을 어깨에 매고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에서 조금 혼란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중요한 날이니 만큼 깊이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엘레베이터가 도착했고, 여자가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이 조금씩 벽으로 물러나 그녀가 들어올만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여자는 가벼운 미소로 답례를 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개찰구가 있는 층으로 올라가는 중, 문 왼편의 작은 모니터에서는 공익광고 따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롭게 강화된 임산부 배려석 정책이 찾아갑니다. - 서울특별시’

내용인 즉슨, 얼마 전까지 말이 많았던 임산부 배려석 제도를 대대로 정비해 양보하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을 내놨고, 지난달부터 성공적으로 시행해 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어찌된 일인지 이 정책 덕분에 출산율도 한 달 새 5%나 늘었다는 보도자료도 첨부하고 있었다.

여자는 자리 양보가 그렇게 눈에 띄는 출산율의 증가로 연결되는 것이 조금 믿기 힘들었지만, 덕분에 지하철은 편안히 타고 왔으니 어쨌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자신의 불룩한 배 쪽으로 가만히 손을 가져가 쓰다듬어 보았다. 다만 아이가 건강하길..

10여분 전,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탓으로 졸지에 임산부가 된 여자의 머릿속엔 오로지 그 생각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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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텀블러에 썼던 것을 옮겨와 봤습니다.